[홍영수 칼럼] 사색의 어머니, 밤

홍영수

12월, 매듭달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마지막 달, 아니 또 다른 해를 준비하는 십이월 중순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등잔의 호롱불 아래 바느질하시고 인두를 화롯불에 달구고, 다리미에 숯을 넣어 주름진 옷을 다리고 구김을 폈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주로 밤, 특히 동짓달 기나긴 밤에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유는 농사철이 끝나면 그 시절 겨울엔 특별히 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골과 도시를 떠나, 이러한 밤 풍경은 엇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처럼 밤이란, 밤의 시간이란, 낮에 활짝 열어두었던 감각과 의식의 문을 잠시 걸어 잠그고 어떤 이성과 논리를 떠나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하며 사유하는 철학적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예전, 티브이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지금처럼 티브이, 컴퓨터, 핸드폰 등이 없던 시절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달의 침묵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기도 하고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밤은 사색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다. 밤은 그 어떤 모습도 어둠이라는 품속에 안아버리고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등등의 색깔도 어둠이라는 스펀지로 빨아들인다. 밤의 어둠이야말로 환한 낮과 달리 자신의 의식이나 관념 등을 주변의 환경 속에 침잠시켜주는 용해액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밤이 실종된 것은 아주 오래전은 아니다. 티브이와 손에 쥔 자그마한 사각형의 빛과 컴퓨터라는 존재 등, 그리고 꺼질 줄 모르는 도심의 휘황찬란한 빛들로 인해 하늘과 지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낮과 밤의 다름을 지워버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 빛의 문명이, 밤의 사색, 쉼, 잠시의 여유를 죽이고 있다. 그래서 밤 또한 낮의 연장이고 손에서 떠날 줄 모르는 작은 빛과 티브이의 빛은 밤에는 잠시 닫아야 할 감각과 의식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다. 

 

예전에 보았던 헤르만 헤세의 산문집 <밤의 사색>을 꺼내 보았다, 밤은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정적 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깊은 사색과 반성과 성찰의 시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를 안아주고 고통과 상실감 등을 감싸면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 바로 밤으로 나타난다. 500년 전 황진이가 읊조렸던 ‘동짓달 기나긴 밤을’의 시조 한 수를 보자

 

동지(冬至) 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 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마음속 누군가를 절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에 기나긴 겨울밤의 한허리를 잘라내어 그이와 함께 이불속에 겹겹이 놓았다가 고이고이 펴낸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동짓달의 긴긴밤이다. 또한, 고려 때 문신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의 시에도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했고,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이라는 책의 글에 ‘당신도 그것을 알까?’라는 시의 둘째 연, “그런 날에는 갑자기 심장이 아픈 사람처럼/잠자리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기쁨과 웃음은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지고/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당신도 그것을 알까?”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잠 못 이루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시간이 바로 밤이다.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특히 가을밤에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여치 소리, 풀숲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 뒷동산에서 밤의 정적을 깨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등등은 모두 밤에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광경들이다. 청각과 시각의 융합, 어둠과 밝음의 껴안음 등이 바로 밤의 풍경이다. 밤이란, 이조년의 ‘다정의 세계’이고, 황진이의 ‘어론님 오신 날 밤’이고, 헤세의 ‘잠 못 이뤄 눈물을 쏟는 밤’이다. 

 

밤은 낮이라는 옷에 오염된 때를 씻어주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낮의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의식을 세탁해 주는 그러한 밤. 시골과 도시, 그 어느 곳에서도 빛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것들에 의해 지금 밤이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부재하는 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밤은 사유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를 농익게 하는 시간이다.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혼의 밤, 성찰의 밤, 사색하는 밤의 시간을 가져야 할 밤이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12.15 11:16 수정 2025.12.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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