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지내러 가는 길

다시 찾은 사랑

해돋이 장면. 사진=최영미

아버지 기일 37주기, 주간보호센터에 가신 엄마를 모시고 일산에서 출발해서 친정오빠가 있는 서울 중심까지 2시간 걸려 도착했습니다. 

동생은 떡을 언니는 나물을 저는 산적을 준비해서 여행한 셈이죠. 

가는 길에 아버지가 그리운가 생각나는 게 있는가를 엄마에게 기대 없이 물었습니다. 어차피 지금 어디 가는지 왜 가는지도 10초씩 기억하시니까요.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전거에 동생과 저를 태워 행주산성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나나 우유를 사주시던, 비 오는 날은 그 자전거 타고 홀딱 비에 젖은 채 동생과 저를 기다리시던, 동생과 저를 자전거 뒷자리와 앞자리에 태워 비에 젖지 않게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주시던. 우리는 아버지가 준비해 온 비닐을 뒤집어쓴 채 아버지 허리를 꼭 붙들고 왔으니까요. 그땐 왜 그리 창피하던지, 지금은 그런 마음을 내색했던 게 한없이 미안하지만 말입니다. 비를 피할 수 없던 신발은 아버지가 빨아서 부뚜막에 올려 말리고 김치 부침개를 해주셨습니다. 모양은 투박했지만 그리 맛있을 수 없었죠. 바나나 우유도 처음 먹어본 거라 바나나 우유를 보면 아버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좀 더 커서는 집에만 있는 아버지가 의아했습니다. 워낙 허약체질이라 일하러 갔다가도 점심 전에 돌아와서 술을 먹고 주무셨습니다. 후딱 먹고 얼른 자고 일어나서 엄마에게 시치미를 떼야하니까요.

 

직장 야유회가 있으면 곱게 차려입고 화장도 하고 단상에 올라가 노래도 불러 상품을 거하게 타오시던 엄마는 공장 먼지를 뒤집어쓴 채 퇴근해서 숨기려 했던 아버지 몸에 밴 술냄새를 타박하고 말이 곱지 않던 아버지와 한차례 실랑이를 벌이다 저녁을 챙기고 일찍 주무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겠냐 싶은데 엄마의 대답이 의외입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것만 기억나” 치매 14년 차로 자식들도 못 알아보는 날이 많은 엄마입에서 나온 말에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가끔 ‘내 엄마’ 맞다 싶은 순간이 있는데 지금입니다.

 

집에 오려면 넘어야 할 작은 야산이 있었는데 어두침침할 땐 인적이 끊기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꿈에 거대한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산인데 아버지가 매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겁 많은 엄마 손을 꼭 잡고 함께 걸어왔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 산이 정겹게 다가옵니다.

 

엄마의 기억에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남편이 아니라 표현이 거친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했지만 때때로 따뜻한 손과 마음으로 보듬어주던 동갑내기 친구였던 모양입니다. 

생전엔 돈 못 번다고 그리 타박을 하시더니만. 세월이 깊어질수록 그 마음만 기억나시는 게지요.

 

아버지 제사는 제게도 중요한 날입니다. 남편과 인연을 맺게 한 날이니까요. 

마흔 넘어 만난 그와 밀고 당기는 시간이 2년째 지지부진 이어갔습니다. 평소에도 거절당할까 두려워 먼저 만나자는 말도 꺼내기 힘든 소심한 제가 어떤 용기가 나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제삿날 그에게 전화했어요. 그만 방황하고 아버지제사니까 인사드리러 오라고.

 

어이없이 웃고 전화를 끊더니, 다시 받지 않습니다. 이젠 끝이다 싶어 마음을 정리하려고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뜻밖에 돌아오자마자 만나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잃을뻔했던 그를  당겨올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사랑이 먼 곳에서 전해진게 아닐까 싶어 그에게 서운한 게 있어도 매년 아버지 제삿날에 리셋됩니다. 어떤 일이 있었건 그날엔 감사한 인연으로 바뀌는 게지요.

그런 날이 있지요. 나를 리셋시키는 날, 살아있는 그날그날이 모두 소중할 테지만 말입니다.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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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1.04 15:32 수정 2026.01.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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