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재난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함께 노래할 수 있을까

루체테 음악극연구소 창작 오페라 ‘페스트 2026’

16세기 말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음악적 낭송을 복원하려는 열망 속에서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다. 말과 노래, 신체와 운율이 다시 하나로 결속되는 순간, 오늘날 우리가 ‘오페라’라 부르는 장르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 장르는 애초부터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복원 불가능한 시간에 말을 걸려는 시도였다. 

 

디지털 이미지가 감정을 실시간으로 소비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한때 궁정의 스펙터클이자 권력과 취향, 과시의 음향으로 기능해 왔던 오페라 형식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호출될 수 있을까. 루체테 음악극연구소의 창작 오페라 〈페스트〉는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오페라라는 장르를 매개로 재난 이후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는 인간의 윤리를 탐색한다.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명확하다. 연대란 과연 선언될 수 있는가. 아니면 소리와 호흡, 반복과 인내의 수행 속에서만 형성되는 감각인가. 이 질문 앞에서 <페스트>는 다시 현재형의 예술로 거듭난다.

 

초연 이후 한국 사회는 2024년 12월, 계엄령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다. 봉쇄된 도시, 통제와 감시, 자유의 박탈이라는 설정은 더 이상 무대 위의 상상이 아니다. 알베르 카뮈가 1940년대 알제리에서 포착한 재난의 풍경은 2025년 부산의 공연장에서 예언처럼 되살아났다. 이런 맥락에서 페스트의 재공연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우연을 의도로 전환하는 '사건'이다.

 

〈페스트〉의 가장 큰 성취는 ‘연대를 말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연대를 형식 그 자체로 조직한다는 데 있다. 작품은 거의 집요하리만큼 합창을 배치한다. 독창이 개인의 결단과 고뇌를 표상한다면, 합창은 감정이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청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때 연대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관객은 그 속에서 연대를 '이해'하기보다 연대의 감정을 '체험'한다.

 

작품의 공간 전략은 이러한 형식적 성취를 한층 강화한다. 루체테 음악극연구소는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이란 현실의 무대를 작품의 정서와 윤리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전환시켰다. 극 중 장군은 시종일관 객석 속에서, 관객조차 숨죽이게 만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경찰들은 통로를 가로지르며 범인을 색출하는 긴박한 긴장을 생성했다. 이때 관객은 더 이상 무대 밖의 안전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극장은 봉쇄된 도시로 변모했고 관객은 페스트에 갇힌 오랑의 시민으로 전이되었다. 이 장치는 단순히 계엄의 공포를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관객을 윤리적 판단의 현장으로 직접 끌어들이는 클레멘스 베히텔 특유의 극적 연출이자 정치적 제스처였다.

 

음악 역시 카뮈의 철학적 층위인 부조리와 실존적 연대를 음향으로 번역하는 데 상당 부분 성공한다. 극 중 의사와 기자, 식당 여주인의 음색은 각자의 윤리적 결단을 설득력 있게 떠받쳤다. 시장과 장군의 단호한 발성은 권위의 폭력성을 청각적 압박으로 구현해 내었다. 특히 바리톤 김종표가 연기한 의사의 형상은 단순한 의로움이 아니라 고뇌 속에서 선택되는 윤리로서의 인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럼에도 대본의 한계는 이번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카뮈의 언어가 지닌 문학적 밀도는 오페라 대본으로 이행되면서 불가피하게 희석되었다. 책임, 돌봄, 희생, 연대라는 재난의 윤리적 어휘들이 명료하게 제시될수록 역설적으로 인물 형상의 내적 심층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생긴다. 새롭게 추가된 아이들의 합창 역시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희망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능하지만, 성인 배우들과 동일한 언어로 노래한다는 점에서 아이들 고유의 윤리적 시선이 충분히 분화되지 못했다. 만약 아이들만의 언어, 아이들만의 질문이 대사로 구성되었다면 이 장면은 훨씬 급진적인 윤리적 개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극 중 신부의 형상 또한 아쉬움을 남긴다. 원작에서 가장 복합적인 이 인물은 카운터테너의 초월적 음색 속에서 '오히려' 봉인된 채 머문다.

 

무대는 끝까지 중심을 거부한다. 무대 위 배우들은 고정된 전면을 벗어나 여러 레벨과 동선을 오가지만 관객은 어디를 보아야 할지 특정 지점을 지시받지 않는다. 이는 혼란을 통해 집단적 경험을 설계하는 전략이다. 연대란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상태임을, 이 작품은 연출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페스트>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지역’이라는 조건 속에서 이 정도의 문제의식과 형식적 완성도를 지닌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루체테 음악극연구소와 이 작업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이미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 오페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페스트〉는 그 미완의 중심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6.01.23 09:45 수정 2026.01.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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