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통합의 맛, 김치

홍영수

 

병오년 1월, 새해이다. 지난 1년을 쉼 없이 걸어왔듯이 먼 길을 걷는 자만이 새로운 빛을 볼 수 있고 또한 가장 어두운 밤을 지새운 자만이 달력 첫 장의 첫 숫자를 볼 수 있다. 새로운 출발은 지나온 것에서 시작하고, 새롭게 자라는 것은, 지난날 심어 둔 싹에서 움트는 것이리라. 

 

남녘의 끝자락에서 긴긴 겨울밤을 며칠 보냈다. 초저녁부터 피운 장작불의 타오르는 화력에 구들장 아랫목의 장판을 시커멓게 태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구들장을 등지고 잠을 잤더니 따스한 온기에 엄동설한의 아침인데도 몸이 거뜬했다. 그리고 예전에 방 아랫목으로 발을 향했던 가족들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일찍 일어나 창문 밖을 보니 마당과 장독대, 산과 들에도 하얗게 물들여져 있었다. 방송을 보니 남부지방에 폭설이 내린다고 한다. 예보했듯이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김장 시기는 보통 12월 초이다. 그런데 1달쯤 늦은 이때 김장하기 위해 텃밭에 심어 둔 배추를 캐 왔다. 매년 땅끝마을인 고향 해남에서 해 오던 김장하는 날은 년 중 행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농사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꾸려왔던 한국인의 마음이 좀 분주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김장하는 날이면 동네의 많은 분들이 와서 함께 모여 절인 배추에 양념을 비비면서 이웃 간의 오가는 정과 한겨울의 추위도 함께 버무리며 오순도순 얘기 꽃을 피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흔한 풍경을 보는 게 쉽지 않다. 이유는 대부분 시골에 사시는 분들은 노인층이 주류를 이룬다. 그렇기에 맹추위에 오가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나이 듦에서 오는 신체적 불편함으로 나들이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더욱 그러하다. 김장할 때는 남자들의 몫이 따로 있다. 절여서 무거워진 배추와 버무리고 난 후 옮기는 일과 물 등을 길러주는 등등, 어쩜 김장은 분업의 상징성을 띠는 작업이 아닐까.

 

김치의 재료는 빨간 고춧가루와 무, 배추와 생강 젓갈 등등 – 물론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 다른 재료들과 다른 맛들이 함께 어울려 빚은 ‘통합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식재료들이 맛있게 버무려서 어울린 맛, 부조화 속의 조화로운 맛이다. 예를 들어 진즉부터 학제 간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추세를 가늠해 보면 다른 분야의 영역을 넘나드는 학자들의 연구에서 학문의 새로운 지향점을 유추해 볼 수 있을 있듯이 새로운 관점이나 새로운 소통의 시작은 이질적인 것들의 틈새와 경계를 지우고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들과의 이종의 결합, 즉 하이브리드적인 요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어쩜 새로운 것은 동종교배가 아닌 이종교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바로 우리 고유의 김치가 모양도 색깔도 맛도 다른 종의 통합에서 나온 식품이다. 그래서 날것으로 먹는 생식도 구워서 먹는 화식도 아닌 발효식품이다.

 

이러한 김치는 지금 한류 열풍으로 세계 각국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인 김장의 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무엇보다 김치를 담글 때 이웃들과 나누는 공동체 문화가 인정받아서 그럴 것이다. 사실 김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품고 있는 나눔과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함께 나누는 정, 그러한 풍습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치는 바로 갓 담은 김치와 잘 익은 김치, 시어진 김치, 묵은김치 등의 숙성 단계에 따라 취향과 요리의 용도에 따라 선택된다. 또한 같은 재료의 김치라도 집집마다 다르다. 예전에는 김치를 땅속에 묻어서 발효시켰다. 아마도 조상들의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의 덕이 아닌가 싶다. 요즘에는 어느 가정에나 있을 법한 김치냉장고가 있어서 땅속에 묻어둘 일은 없어졌다. 이러한 김치냉장고라는 가전제품이 과연 어느 나라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 음식문화의 대표적 가전이 아닌가 싶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발효된 김치처럼 그 김치를 숙성하여 발효시키는 김칫독처럼 인생의 삶도 사랑도 뒷마당에 자리한 김칫독과 그 안의 김치처럼 숙성되고 발효되는 마음과 생활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가만히 들여다본다. 얇은 한 조각에서 쑥쑥 자라나던 배추의 욕망을 보고 밭의 웅성거림을 듣는다. 설한의 긴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고 발효되어 가는 곳, 그 장독대에서 곰삭은 어머니의 손맛과 새벽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지구의 유언장』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6.01.26 10:57 수정 2026.01.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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