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 칼럼] 호생오지 인생오세

곽흥렬

매서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목덜미를 후려친다. 쏴쏴 하며 내지르는 소리가 진지를 향해 달려드는 적군들의 함성 같다. 귓불이 떨어져 나가는 듯 얼얼해 온다.

 

북경의 만리장성을 오르고 있다. 여태껏 말로만 들어왔던 이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직접 두 발로 밟아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만리장성이야말로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구조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동면에 든 주위의 나목들로 인해 그 자태가 더욱더 웅장해 보인다. 과연 ‘대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풍이 느껴지는구나 싶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솟구친다. 

 

회흑색 전돌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계단이 산등성을 타고 꼭대기까지 질서정연하게 이어져 있다. 마치 거대한 흑룡이 꿈틀대면서 하늘로 오르는 형상을 닮았다. 머리에 난 뿔이며 몸통의 비늘이며 거기다 엉버틴 다리까지 영락없는 용 그대로다.

 

헉헉,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면서 한 단 한 단 디디고 올라간다. 그러고 있노라니, 이 하고많은 계단을 아무런 장비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맨손에만 의지해 쌓아 올리느라 흘렸을 민초들의 피와 땀이 눈에 잡힌다. 한숨 소리, 신음 소리, 절규의 울부짖음도 들리는 것 같다. 한번 장성 쌓는 대역사에 징발이 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웠을 만큼 노동의 강도가 혹독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그런 세간의 이야기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성싶다. 

 

불현듯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해적선과의 싸움에서 노예선으로 끌려와 노를 젓고 있는 죄수들의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잠시라도 느슨해질세라, 노역櫓役을 독려하는 감시자들의 채찍이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두 발목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다. 등허리에 난, 구렁이가 감긴 듯 시뻘건 멍 자국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말해 준다.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처절한 노역勞役에 부르르 전율이 일었었다. 영화 속의 장면을 그리면서 만리장성 축조 상황을 상상하노라니 그 역사 앞에 숙연해 온다. 

 

잠시 울울하던 마음을 거두고 내부를 둘러싼 성벽의 돌들에 시선을 던진다. 순간, 뜻밖의 장면이 지금까지 가졌던 인상을 순식간에 일그러뜨리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외벽으로 쌓아 올린 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닥에 깔린 계단석에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만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쳐 간 자취인지 어느 한 군데도 온전한 곳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흔히들 ‘글로벌 시대’라지만, 엉뚱하게도 그 말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는 듯하다. 중국 자기 나라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글이며 영어며 불어, 일본어, 독일어, 거기다 아랍어까지……. 실로 세계 문자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멀리서 바라다보았을 땐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해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간 순간 깊은 탄식이 터져 나오면서 혀가 끌끌 차인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위대한 문화유산에 이 무슨 양식 없는 행실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름 명名’ 자의 의미를 ‘새길 명銘’ 자로 곡해하고 있는가 보다. 무형의 향기로운 이름을 후세에 유전하여야 그것이 값진 것이거늘, 어째서 한사코 돌에다 그 고약한 냄새 풍기는 이름을 새기려 한 것일까.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세상살이의 가르침 아닌가. 요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이 의미 깊은 교훈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것 같다. 피나는 노력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빛날 꽃다운 이름을 남기려는 생각 대신, 어쨌든지 비바람에 씻기어 자취조차 없어지고 말 허망한 이름을 남기려고 안달한다.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마구 갈겨놓은 이름으로 온통 도배질이 되어 있다. 

 

‘호생오지虎生汚地 인생오세人生汚世’, 세상이 바뀌니 이제 한자 성어도 이렇게 버전이 바뀌어야 할까 보다. 호랑이는 살아서 산야에 싸지른 똥으로 땅을 더럽히지만, 사람은 살아서 돌에 새긴 이름으로 세상을 더럽힌다. 그깟 이름 석 자가 뭐 그리 대수롭다고, 죽어서 이름을 남겨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 하지 않고 살아서 기를 쓰며 이름을 새겨 이 지구별을 오염시키려 드는 것일까.

 

법정 스님이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시자侍者들에게 당부한 유언이 떠오른다. 

 

“일체의 장례 의식을 치르지 말라.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서 참회할 것이다. 지금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된 책은 죄다 거두어서 태워 없애라.”

 

이승에서 길어 올린 것들은 이승을 하직하면서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겠다는 오롯한 비움의 정신이 아닌가. 스님의 그 서릿발 같았던 삶의 자세가 오늘따라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영사기의 필름을 되감기하듯 지나간 날들의 영상을 되돌려 본다. 살아오면서 퍼질러 놓은 내 숱한 행동이 사람들의 가슴에 욕된 이름으로 남겨졌을까, 아니면 아름다운 이름으로 새겨졌을까. 적이 스스러운 마음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유방백세流芳百世라고 했다. 향기로운 이름은 굳이 돌에다 새기지 않아도 천년만년을 길이길이 전해지게 되는 법이다. 이 영원불변할 세상살이의 이치를 곰곰이 음미해 본다.

 

만리장성의 전돌을 빼곡히 도배해 놓은 오만 이름 없는 이름들, 어떻게든지 자신의 흔적을 남겨 보려는 그들의 헛된 욕망의 자취가 적이 볼썽사납다. 아니, 얼마나 안달이 났으면 그랬을까 싶은 마음에 한편으론 연민이 인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살아서 땅 위의 돌에 새기는 이름이 아니라 죽어서 후세 사람들의 가슴에 새기는 이름인 것을…….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6.01.27 11:26 수정 2026.01.2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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