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회복을 넘어

민은숙

설경을 입은 아침,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웨딩드레스처럼 내려앉은 눈이 잠시 사람들을 멈춰 세운다. 기다림의 기척이 배어 있는 풍경에서 불안이 번진 손끝으로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대신 콜택시를 불렀다. 주차난이 예상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안전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몸이 평소와 다른 말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작은 결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한다.  

 

대기실은 사람들의 숨과 체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표를 마음에 담은 채 호명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는 천장을 바라보며 평소와 다른 시선을 가둔다. 이곳의 공통분모는 ‘기다림’이라는 무게이다. 병원 대기실은 묘하게 접힌 시간의 주름이다. 과거의 건강했던 몸, 현재의 불안정한 몸, 그리고 회복을 기다리는 몸이 한 공간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아직 낙관이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상처 입은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듯 살아간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시제로 앞당겨 경험할 때가 있다.  

 

의사는 정제된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은 당분간 하지 마시고, 가벼운 걷기와 계단 오르기를 해보세요. 그러면 호전될 겁니다.” 그 말속에는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없는 지켜보자는 태도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환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괜찮아질 거예요, 곧 예전처럼 돌아올 거예요”라는 문장을 쉽게 발설하지 않는 그 조심스러움에서 오히려 더 깊은 연민이 느껴진다.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철학적 긴장과 마주한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회복’이라는 서사를 갈구하는 걸까. 우리는 되돌아감을 구원으로 삼아 변화된 채로 남음을 패배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니체가 말한 “너 자신이 되어라(Werde, der du bist)”라는 문장은 평소에는 해방의 문장처럼 들리나 예기치 않은 병 앞에서는 잔인한 명령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만 ‘나’가 된다는 집요한 호소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라고 했다. 의사는 지금 눈앞의 몸, 곧 사물의 상태를 말하고 있었다. 반면 환자는 그 몸에 대한 자신만의 판단을 읊고 있었다. 몸에 변화가 생겼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결핍·상실·실패로 받아들이곤 한다.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가장 얇은 경계선은 기대이다. 기대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서 고통을 증폭시키고 수용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두면서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발견하게 한다. 계단 한 칸 한 칸을 천천히 내딛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잠시 전부로 삼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natality)’을 인간의 본질로 본다면, 그것은 단순한 태어남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 가능성이다. 병원 대기실에서 우리는 모두 실존주의자가 된다. 아렌트가 강조한 시작의 가능성과 달리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고 했다. 인간은 병 앞에서도 선택을 강요받는다. 포기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중간 어디쯤에서 버텨야 한다.  

 

의사의 말투에 숨은 지켜봄의 태도는 어쩌면 시간을 존중하는 겸손한 방식일지 모른다. 인간은 결코 타인의 몸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의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예언처럼 환자가 간절한 말을 쉽게 건네기보다 가능성의 언어를 남겨 환자에게 스스로 치유를 도울 자유의지를 돌려준다. 질병은 그저 질병일 뿐이다. 몸의 언어지 영혼의 징벌이 아니다. 계단을 오르라는 단순한 처방은 이 지점에서 오히려 급진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이내 몸을 다시 몸으로 되돌려놓는다. 움직이고 호흡하는 시간 속에서 회복은 누적된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세계-내-존재’의 근원적 장소로 보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몸이 아프면 세계 자체가 축소된다. 역설적이지만 몸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계단 한 칸 한 칸은 방향이다. 위로가 아니라 앞을 향한 움직임이다.  

 

콜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말을 잘 듣지 않았으나 마음 어딘가에서 희망을 품은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계단 한 칸을 오르는 상상을 하며 그 한 칸이 누군가에게는 온전한 한 걸음임을 느낀다. 어쩌면 치유란 돌아감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완전함으로부터의 출발이 병원 대기실에서 배우는 가장 깊은 지혜일 것이다. 눈발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세상은 여전히 하얗다. 이미 덮인 눈 위에 또 다른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존재에게 이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2.04 09:30 수정 2026.02.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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