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한 시대이기에 점집의 불이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사주와 타로, 별자리점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내일을 묻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알고 싶은 것이다.
운명론의 유행을 단순히 비이성의 귀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감각이 약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적어도 미래의 징후만큼은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계획이 어려워질수록 징후는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점칠 수 있는가. 미래의 사건을 정확히 알아맞힌다는 뜻이라면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너무 많은 변수와 상호작용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태어난 시대와 가족, 계층과 지역, 몸과 교육, 뜻밖의 만남과 헤어짐, 제도와 사회적 사건, 그리고 매 순간의 선택이 서로 영향을 주며 삶의 경로를 만든다. 어느 하나의 공식이나 몇 개의 기호로 한 사람의 앞날을 빠짐없이 계산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그러나 운명을 점친다는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것은 정답을 미리 받아 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선 자리의 지형을 읽는 일일 수 있다. 어느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어느 길은 오래 돌아가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출발선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득한 언덕일 수도 있다. 지형은 목적지를 대신 정해 주지는 않지만, 어떤 걸음으로 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명리는 오랫동안 그런 지형을 읽으려 했던 해석의 언어 가운데 하나였다. 흔히 명리를 태어난 순간에 인생 전체가 결정된다는 숙명론으로 이해하지만, 전통 명리의 세계가 언제나 그렇게 단순했던 것은 아니다. 흔히 회자되는 “일명(一命)·이운(二運)·삼풍수(三風水)·사적음덕(四積陰德)·오독서(五讀書)”라는 말도 타고난 조건뿐 아니라 때의 흐름과 살아가는 환경, 행위의 축적과 배움이 함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명과 운은 결과의 이름이라기보다 조건을 해석하기 위한 개념으로 읽을 여지가 있다. 같은 사주를 지닌 사람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도 결정론적 해석에는 곤란한 문제다. 물론 여기서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명리의 과학성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이론이라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를 제시해야 하고,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틀릴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조건에서 어느 정도 일관된 예측력을 보여 주는지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명리 상담에서 경험하는 ‘적중’도 그것만으로 예측력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에게 두루 들어맞도록 열려 있는 진술은 누구에게나 자기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잘 들어맞는 진술을 더 쉽게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지나치기도 한다. 해석은 듣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도 한다. 좋은 운을 들은 사람이 더 과감해지고 나쁜 운을 들은 사람이 몸을 사린다면, 그 예측은 맞았다기보다 스스로 실현된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개인의 강렬한 경험과 체계의 객관적 예측력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명리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자리에서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이 자주 불려 나온다. 이 역시 조심스럽게 보아야 할 대목이다. 나비 효과가 있으니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양자역학이 확률을 말하니 결정된 운명은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카오스 이론이 흥미로운 까닭은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떤 계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에 민감하다면 장기적 예측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른바 나비 효과다. 이것은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연구하면서 확인된 성질이지, 인간의 운명이나 명리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이론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그 세계의 미래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충분한 정보만 확보하면 복잡한 미래까지 언제나 정확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
양자역학의 언어에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중첩’, ‘불확정성’, ‘관찰자 효과’ 같은 말은 삶을 설명하는 데 매혹적인 비유가 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 측정은 인간의 마음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다. 양자계와 측정 장치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을 인간의 의식이나 의지와 곧바로 연결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믿음이 변화의 동력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이 믿음만으로 결정되기에는 삶도 세상도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과학이 아니라는 말이 곧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이해하고 싶어 하며, 바꿀 수 있는 것과 견뎌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각자 삶의 방향을 묻는다. 명리는 오랫동안 그 물음에 응답해 온 하나의 문화적·해석적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지금 우리의 미래를 가장 광범위하게 예측하고 있는 것은 사주를 풀이하는 사람이나 타로카드를 펼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수많은 데이터로 바꾸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의 행동이나 위험을 추정하는 알고리즘이 이미 우리의 삶 곳곳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알고리즘이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델은 주어진 데이터와 변수, 설계자가 정한 목적과 가정 아래에서 점수와 확률, 순위와 분류를 산출할 뿐이다. 그것은 미래 자체가 아니라 미래에 관한 통계적 추정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통계적 추정이 현실의 의사결정에 사용되는 순간, 예측은 단순한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대출 위험이 높다고 평가되면 더 불리한 금융 조건을 제시받을 수 있고, 자동화된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기회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 앞서 명리 상담에서 보았던 자기실현의 구조가 이번에는 훨씬 큰 규모와 무거운 결과를 안고 반복되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이 미래를 정확하게 맞혔느냐는 질문만이 아니다. 그 예측 자체가 미래를 구성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다.
낮은 신용평가 때문에 더 높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더욱 취약한 경제적 조건에 놓일 수 있다. 과거의 불리한 조건을 학습한 모델이 그것을 위험의 지표로 삼는다면, 이미 존재하던 불평등은 새로운 판단의 근거로 되돌아온다. 물론 모든 알고리즘적 예측이 이런 자기강화적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적절하게 설계되고 검증된 모델은 인간의 자의적 판단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문제는 알고리즘 그 자체가 아닐 것이다. 어떤 데이터를 사용하는가. 무엇을 예측하려 하는가. 오류는 누구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치는가. 그 결과를 어떤 의사결정에 연결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중요해진다. 지금은 데이터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종류의 운명론을 경계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고의 최악의 결과는 우리의 선택과 책임을 지운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답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과 인과의 무게를 지워 버린다. 두 양극단은 우리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미래는 그 사이에서, 조건들이 나를 통과하고 또한 우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미래를 바꿀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감각,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감각이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한다.
미래의 자유는 아무도 나를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나에 대한 어떤 예측도 곧바로 나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내가 그 예측의 근거를 묻고, 틀렸다고 말하며, 다시 판단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조건이 누군가의 미래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면, 우리는 그 조건 자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의 자유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