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옥의 『디카시와 철학』은 겉으로 보기에 야심 차다. 플라톤에서 지젝까지, 무려 22명의 철학자를 불러내 디카시라는 장르에 철학적 심연을 부여하겠다고 한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곧 깨닫는다. 이 책에서 철학은 사유의 대상이 아닌 장르를 정당화하기 위한 권위 목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단순한 해석 차이가 아니다. 철학 이론이 작동하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파괴하였다는 점이다. 아래와 같이 살펴본다.
1부 기원과 형상
1. 디카시와 플라톤(Plato, 기원전 427/428~347) 이데아의 감각화 오류
이상옥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시적 실재의 원형’으로 호출한다. 디카시의 날이미지, 곧 사진을 이데아의 현현처럼 다룬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 미학을 정면으로 전도하는 해석이다. 플라톤에게 감각적 형상은 이데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모방의 모방이다. 진리에 이르는 경로가 아니라 인식의 혼란을 낳는 층위이다. 이데아는 감각 포착의 정점이 아니다. 감각의 불충분성을 부정함으로써만 접근 가능한 개념적 실재이다. 디카시론에서는 사진이라는 감각적 산출물이 곧바로 ‘원형의 드러남’으로 제시된다. 이로써 플라톤 철학의 핵심 구분, 즉 이데아와 감각의 비대칭성은 완전히 붕괴한다. 철학적 상승 운동을 이미지 숭배로 대체한다.
2. 디카시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미메시스의 구조 삭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사가 아니다. 그것은 행위의 구성, 서사의 인과성, 필연성과 개연성이라는 복합적 구조를 포함한다. 디카시론은 이를 ‘이중적 재현’으로 축소한다. 사진과 짧은 문장의 병치를 곧 미메시스로 간주한다. 이는 미메시스를 형식적 닮음으로 오독한 결과이다. 『시학』에서 미메시스는 시간성과 윤리성을 통해 인간 행위를 사유하는 장치이다. 디카시는 이 구조를 제거한 채 결과물만을 제시한다. 서사는 사라지고 장면만 남는다.
3. 디카시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신학 개념의 미학적 전유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계시라는 초월적 진리 질서를 전제로 한다. 이를 감각과 언어의 만남으로 전치하는 디카시론은 신학 개념을 종교적 맥락에서 분리해 미적 체험의 은유로 소비한다. 이는 범주 혼동이다. 계시를 미적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다. 신학적 진리를 감각적 충만으로 대체할 수 없다. 이때 아퀴나스는 철학자가 아닌 권위 있는 장식물로 기능한다.
2부 주체와 인식
4. 디카시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코기토의 즉시성 환원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방법적 회의를 거쳐 도달한 이성적 확실성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날시 포착과 사유의 자각’으로 연결한다. 찍는 순간의 자각을 곧 철학적 주체 성립으로 착각한다. 회의와 추론의 과정은 삭제된다. 코기토는 순간적 체험으로 환원된다.
5. 디카시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미적 판단의 구조 붕괴
칸트의 미학은 개념 없는 합목적성과 보편적 타당성 요구라는 초월론적 구조를 전제로 한다. 디카시론에서는 이를 감각과 이성의 심리적 교차로 단순화한다. 이는 판단 능력 비판을 감상 심리학으로 전락시키는 해석이다. 미는 사유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로 축소된다.
3부 존재론과 실존
6. 디카시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존재 사건의 이미지화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와 에어아이그니스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이미지의 ‘드러남’으로 설명한다. 은폐와 드러남의 긴장은 제거한다. 존재는 가시성으로 환원한다. 이는 기술적 재현을 존재 사건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7. 디카시와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체화된 지각의 카메라 환원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은 몸과 세계의 상호 얽힘을 사유한다. 디카시론은 이를 시각적 포착으로 단순화한다. 체화된 지각은 카메라 시선으로 환원한다. 몸은 사유의 장이 아닌 기록 장치가 된다.
8. 디카시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실존적 자유의 즉흥화
사르트르의 자유는 선택 이후의 책임을 포함한다. 디카시론은 이를 순간적 표현의 자유로 축소한다. 실존의 윤리적 무게를 제거한다. 자유를 이미지 생산의 권리로 오해한다.
9. 디카시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 W. F. Hegel, 1770~1831) 변증법의 결과물 숭배
헤겔에게 정신은 과정이다. 디카시론은 작품 하나를 곧 정신의 현현으로 제시한다. 운동은 삭제하고, 결과만 남는다. 이는 헤겔 철학의 핵심을 제거한 독해이다.
4부 욕망과 언어
10. 디카시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무의식의 상징 소비
무의식은 역동적 구조이다. 디카시론에서는 이미지의 은유성으로 소비한다. 해석의 노동은 사라진다. 무의식은 분위기이다.
11. 디카시와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기호 체계의 해체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디카시론은 이미지와 문장 결합 효과를 곧 의미 생성으로 간주한다. 구조를 삭제한다. 언어는 보조 설명으로 전락한다.
12. 디카시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욕망 이론의 미학화
라캉의 욕망은 결핍의 구조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감각적 층위로 환원한다. 구조는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13. 디카시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푼크툼의 감상주의화
푼크툼은 사진의 정치성을 교란한다. 디카시론에서는 개인적 감동으로 축소한다. 비평적 긴장을 제거한다.
14. 디카시와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Gilles Deleuze, 1925~1995 / Félix Guattari, 1930~1992) 생성 개념의 형식화
생성은 개념 생산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형식 실험으로 오독한다. 철학을 스타일로 소비한다.
15. 디카시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담론 분석의 장르 정당화
담론은 비판 대상이다. 디카시론에서는 정당화 장치로 전락한다.
16. 디카시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해체의 무제한화
해체는 독해 책임을 요구한다. 디카시론에서는 의미의 개방이라는 미사여구로 소비한다.
17. 디카시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아우라의 낭만적 소비
아우라는 정치적 개념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감성의 문제로 축소한다.
18. 디카시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 시뮬라크르의 무력화
시뮬라크르는 현실 붕괴의 징후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미학적 조건으로 수용한다.
5부 생성과 관계
19. 디카시와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개체화 이론의 작품화
개체화는 과정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완성된 결과로 고정한다.
20. 디카시와 미셸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매개 개념의 장식화
매개는 소음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조화의 은유로 순화한다.
21. 디카시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 해석학의 주관화
해석은 역사적 긴장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개인 감상으로 축소한다.
22. 디카시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 이데올로기 비판의 탈정치화
지젝의 비판은 불편함을 요구한다. 디카시론은 이를 통찰로 순화한다.
종합 결론
『디카시와 철학』에서 철학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권위의 저장고이다. 22명의 철학자는 개념적 급진성을 제거당한 채, 장르 정당화를 위한 인용 장치로 호출한다. 결과는 융합이 아니다. 개념의 평면화이다. 범주 혼동이다. 철학의 미학적 소비이다. 디카시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철학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디카시는 끝내 철학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데아는 감각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디카시의 ‘시적 실재’로 부르는 순간, 플라톤은 이미 배반당한다. 플라톤에게 감각적 이미지는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림자이다. 이데아로 가는 통로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진이라는 감각의 극치를 이데아의 현현처럼 다룬다. 철학을 인용했지만, 철학의 전제는 삭제되었다.
둘째, 미메시스는 사진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는 행위·서사·구성의 문제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이중적 재현’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이미지와 문장의 병치를 미메시스로 호출한다. 이는 『시학』을 읽은 흔적이 아닌 표지만 훑은 독해이다.
셋째, 칸트 이후, 미학은 구조를 요구한다. 칸트의 미적 판단은 감동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이다. 개념 없는 합목적성, 보편성의 요구가 핵심이다. 하지만 디카시론에서 칸트는 창작자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장치로 전락한다. 초월론적 철학을 창작 후기 정도로 격하한다.
넷째, 존재는 ‘잘 찍힌 순간’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드러남과 은폐의 긴장 속에서만 성립한다. 『디카시와 철학』은 알레테이아를 ‘존재가 포착된 이미지’로 바꾼다. 이 순간 존재론은 사진 미학으로 환원하고, 하이데거는 풍경 사진 해설자로 변한다.
다섯째, 현상학은 카메라 사용법이 아니다. 메를로 퐁티의 몸은 세계와 얽힌 지각의 사건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보이는 것을 포착하는 시선’으로 축소한다. 체화된 지각은 카메라 렌즈로 대체하고, 현상학은 촬영 이론으로 오해한다.
여섯째, 욕망 이론은 감상 코드가 아니다.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 데리다에 이르면 상황은 더 분명해진다. 무의식은 상징의 분위기로, 욕망은 이미지의 은유로, 해체는 ‘의미가 열려 있다’는 수사로 전락한다. 철학은 개념을 생산하지 않고, 분위기를 제공하는 장르 장식으로 전락한다.
일곱째, 바르트와 벤야민은 왜 불려 왔는가? 바르트의 푼크툼은 개인적 찌름이 아니다. 벤야민의 아우라는 낭만이 아니다. 디카시론은 불편한 정치성과 비판성을 제거한 채, 두 이론을 이미지 감상의 미사여구로 소비한다. 철학은 안전해지는 순간, 철학이기를 멈춘다.
여덟째, 『디카시와 철학』의 결정적 문제는 단 하나이다. 철학이 디카시를 검증하지 않는다. 디카시가 철학을 소비한다. 『디카시와 철학』에서 철학자들은 반론하지 못하는 증인으로만 호출된다. 개념을 검토하지 않고, 전제를 생략하며, 충돌을 삭제한다. 남는 것은 ‘철학도 말하더라’는 주장뿐이다.
아홉째, 융합이 아니라 약탈이다. 학제 간 융합은 서로의 전제를 존중할 때 가능하다. 『디카시와 철학』은 철학의 엄밀성을 해체하지 않고, 비워 낸 뒤 사용한다. 이는 융합일 수 없다. 개념의 약탈이다. 이론의 탈을 쓴 장르 홍보이다.
따라서 철학은 디카시의 포장지가 아니다. 플라톤을 부르려면 이데아를 감당해야 하고, 칸트를 말하려면 구조를 통과해야 한다. 하이데거를 쓰려면 존재의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디카시와 철학』은 이 모든 요구를 회피한다.
지금까지 『디카시와 철학』이 다수의 철학자를 호출하면서도 개념 간 위계를 설정하지 못했음을 밝혔다. 철학자들은 논증의 필요에 따라 호출되지만, 상호 긴장이나 이론적 충돌은 검토되지 않는다. 그 결과 철학은 사유의 장이 아닌 정당화의 장식으로 기능한다. 이 책은 철학을 많이 사용했지만, 하나의 이론으로 조직하지는 못했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