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과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두 기록을 비교하면서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시기 전투인 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과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두 기록의 비교하면서 조선 수군의 제3차 출전 시기 전투인 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본다.
제2차 출전을 마친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 수군은 여수로 돌아왔다. 이후 가덕과 거제 등지에 왜선 편대가 출몰한다는 정보와 경상도 금산 지역에 적세가 등등하다는 정보 등을 입수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제3차 출전을 준비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제3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총 2번의 전투 경과는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한산도대첩 직전 조선 수군의 상황
제3차 출전 시기 첫 전투는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이다. 역사학계는 이 전투를 조선이 제해권을 확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하고 있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직전 상황을 살펴보자.
「견내량파왜병장」
처음에 ①본도(전라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7월 4일 저녁때 약속 장소에 맞추어 도착하였습니다. 5일 서로 약속하고, 6일 수군을 거느리고 한꺼번에 배를 출발하여 곤양과 남해 지경인 노량에 도착하였더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7척을 거느리고 그곳에 머물러 정박해 있으므로 바다 가운데 함께 모여 재삼 약속하고, 진주땅 창선도에 이르니 날이 저물어 밤을 보냈습니다. 7일 동풍이 많이 불어 배를 운행하기 어려웠습니다. ②고성땅 당포에 이르니 날이 저물어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 있을 때, 피난하여 산에 올랐던 그 섬의 목자 김천손이 신(이순신) 등의 수군을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말하기를 “적선 대·중·소 도합 70여 척이 오늘 미시경(1~3시)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 지경인 견내량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여러 장수를 타이르고, ③8일 이른 아침 적선이 정박한 곳을 향하였습니다. 바다 가운데 이르러 바라보니 왜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선봉으로 나와 우리 배의 뒤를 염탐한 뒤 그 진을 친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추격해 가보니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진을 치고 정박해 있었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다시 여러 진의 병사를 모아 본영(전라좌수영)에서 며칠을 머물며 ①우수사(전라우수사)의 군사를 기다렸다. 19일 마침내 나아가 미조항에서 머물고, 20일 사량에서 머물고, 21일에 ②당포에서 머물다가 밤에 “적이 거제에서 흉도로 향했다.”라는 소식을 들었다. ③22일에 마침내 전알도(고성과 거제 사이 해협인 견내량)에 급히 이르러 적선이 지도에 구름처럼 주둔한 것을 보았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여 예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위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직전 조선 수군의 상황을 서로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위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은 각각 원 숫자와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①번은,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수군이 여수 전라좌수영 진영에 모인 뒤 제3차 출전을 시작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선조실록』(권27, 선조25년-1592년 6월 21일 기유 4번째 기사)과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는 ①번과 달리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수군이 제3차 출전 시기에 노량에서 모였다고 서술하였다. ①번은 제3차 출전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정확히 알기 어려운 정보이다. 이는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 두 기록의 신빙성을 보여주며, 『선조실록』과 「고통제사이공유사」의 해당 기록이 사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②번은, 조선 수군이 당포에 도착한 날 저녁이나 밤에 왜선 함대의 이동 정보를 입수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견내량파왜병장」에 서술된 목동 김천손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보이기 때문에 일부 윤색된 기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의 ②번 내용에 나타난 정보 입수 장소 및 시기가 서로 일치하는 점은 목동 김천손에 관한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해준다.
③번, 조선 수군이 왜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다음날 왜선이 정박한 곳을 향해 이동한 뒤 왜선 규모를 육안으로 확인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이 왜선 정박지로서 언급한 지도는 지금의 통영시 용남면 지도리 지도를 말하며 견내량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는 섬이다. 「견내량파왜병장」이 왜선 정박지를 견내량으로 서술하였으니 두 기록에 나타난 왜선 정박지의 위치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직전 조선 수군의 상황은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2) 한산도대첩 전투 경과
「견내량파왜병장」에 따르면 한산도대첩은 1592년 7월 8일에 벌어졌다. 당시 왜선이 정박한 견내량 일대는 지형이 좁아서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왜선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의 전투 경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다음은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을 각각 원 숫자와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이다.
「견내량파왜병장」
①먼저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그 선봉으로 온 적을 쫓아가 갑자기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여러 배에 있던 왜인들이 한꺼번에 돛을 달고 쫓아왔습니다. 우리 배가 후퇴하는 척하며 되돌아오자 그 적들도 쫓아오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다 가운데 이르러 다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치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아가며 ②각자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 각종 총통을 쏘아 먼저 그 1~2척을 깨뜨리니 여러 배의 왜인들이 기세가 꺾여 달아났습니다. 여러 장수와 군리(軍吏)가 승세를 타고 펄쩍 뛰며 앞다투어 돌진하여 화살과 탄환을 함께 쏘자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한꺼번에 거의 끝냈습니다. 《중략》 ③왜인 400여 명이 형세가 불리하고 힘이 다하여 도망치기 어려움을 알고는 한산도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으며 《중략》 ④견내량 안쪽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①마침내 기를 휘둘러 여러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도록 하였다. 여러 군사가 모두 지난번 사량에서 물러날 때처럼 상앗대를 버리고 달아나고, 우수사(전라우수사)의 군사도 앞장서서 당포 앞을 지나갔다. 오직 수사(전라좌수사)가 탄 배와 녹도만호만이 노젓기를 늦추고 천천히 갔고, 방답의 거북선은 느리고 둔하여 가장 뒤에 처졌다. 적의 모든 병사가 우리를 쫓아 일순간에 전알도(견내량)를 넘어 거의 한산의 큰 바다를 지날 때 우리와 매우 가까운 거리가 되어 그 선봉이 벌써 방답의 거북선에 거의 다가갔다. 이에 수사와 녹도만호가 기를 휘두르며 노를 돌려 급히 그들과 겨루었다. ②포와 북이 하늘을 흔들고 화살과 돌이 비가 내리듯 하자 적이 기세를 잃고 처음에 화포를 쏜 뒤에는 다시 쏠 겨를이 없었다. 여러 장수와 우수사도 잇달아 나아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그들을 크게 쳐부수고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니 떠다니는 시체가 물을 덮고 피비린내가 바다에 넘쳤다. ③그들의 커다란 누선 1척이 빠져 달아나 우리 군사가 승세를 타고 쫓아가자 달아나던 적이 한산도 옆 절벽에 배를 대고 올라갔다. 여러 장사가 강노로 그들을 쏘자 앞사람이 화살을 맞고 떨어져 뒷사람과 서로 부딪혀 넘어지면서 저절로 서로 얽히고 깔려 죽었다. 《중략》 이날 승리에서 잡은 배가 모두 무려 70여 척이었는데, 녹도만호가 홀로 감당한 것이 가장 많았다. ④이날 저녁 화도(거제시 둔덕면 술역리 화도)에서 머물렀다.
①번은, 조선 수군이 거짓으로 후퇴하며 유인하자 왜선 함대가 뒤쫓아왔다고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방답의 거북선이 가장 뒤처졌다고 서술하여 방답첨사 휘하 수군이 앞장서서 왜선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견내량파왜병장」에 방답첨사의 전술 편제가 ‘전부장(前部將)’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견내량파왜병장」은 판옥선 5~6척으로 왜선을 유인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정경운(鄭慶雲, 1556~1610)의 『고대일록』(1592년 7월 19일)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방답첨사를 수군 전부장으로 삼고, 통선(統船) 4척과 거북선 1척을 정비하여 변을 대비했다.’라고 서술하여 왜선을 유인할 때 거북선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밝혔다.
②번은, 전투가 짧은 시간 안에 끝났음을 간접적으로 서술하였다. 현재 역사학계는 「견내량파왜병장」의 ②번 내용에 있는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한꺼번에 거의 끝냈습니다’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한산도대첩이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의 ②번 내용 또한 ‘적이 기세를 잃고 처음에 화포를 쏜 뒤에는 다시 쏠 겨를이 없었다’라고 하여 전투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밝혔다.
③번은, 일본군이 전투가 불리해지자 그 일부 병력이 한산도에 왜선을 대고 육지로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의 ③번 내용은 ‘달아나던 적이 한산도 옆 절벽에 배를 대고 올라갔다.’라고 하면서 그 전투 상황을 상당히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이 배를 댄 절벽이 매우 가파른 지형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한산도 서부 해안을 살펴보면 문어포(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남쪽 해안이 그러한 가파른 바위 절벽 지대이다. 아래 사진은 한산도 일대를 보여주는 항공사진으로서, 흰색 점선으로 표시된 지역이 가파른 바위 절벽 지대이다. 2022년에 출간된 책 『이순신과 통영 한산도』(김일룡·송성모, 통영문화원)에 이 지대의 특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만일 『증병조참판정공전』의 묘사가 정확한 기록이라면,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아래 사진에서 흰색 점선으로 표시된 지역의 서쪽 바다 또는 서남쪽 바다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원중거(元重擧, 1719~1790)의 『화국지』와 일본 자료인 『와키사카기(脇坂記)』를 근거로 하여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지역의 위치를 제시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연구가 제시한 전투 지역의 위치도 위 사진에서 흰색 점선으로 표시된 곳과 가깝다(주간경향, 2019년 11월 18일, 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911081541061&code=116).
④번은, 조선 수군이 전투를 마친 뒤 그날 밤 견내량 아래쪽 바다에서 밤을 보냈음을 보여준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전투 경과는 두 기록에 서술되어 있는 ①·②·③·④번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점을 통해 그 신빙성이 “학술적”으로 더욱 명확히 입증된다.
「견내량파왜병장」이 왜선 73척 가운데 59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14척은 달아났다고 서술한 점에 비해 『증병조참판정공전』은 70여 척을 잡았다고 서술한 점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두 기록 모두 왜선 규모를 70여 척으로 서술한 부분이 주요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한산도대첩 시기 왜선 규모가 70여 척인 사실은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의 『정만록』에도 2차례 나타난다.
(3) 안골포해전 전투 경과
「견내량파왜병장」에 따르면 한산도대첩 이후 조선 수군은 7월 9일 왜선 40여 척이 안골포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7월 10일 전라우수영 수군은 안골포 바깥 가덕도 주변에서 머물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달려오기로 약속하고,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수군은 전투를 치르기 위해 안골포로 나아갔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안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안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다음은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을 각각 원 숫자와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이다.
「견내량파왜병장」
(7월) 9일 ①가덕으로 향해 나아갈 때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정박하고 있다고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여 본도(전라도) 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적을 토벌할 계책을 상의하였으나, 이날은 날이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고 역풍이 많이 일어 나아가 싸울 수 없어 거제 온천도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중략》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②왜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와서 정박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방이 있는 3층 대선 1척과 2층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해 정박해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는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정박해 있었습니다. ③그 포(안골포)는 지세가 좁고 수심이 얕아서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드러나므로 판옥대선은 쉽게 드나들 수 없으므로 2~3차례 유인했지만 《중략》 어쩔 수 없는 형세이므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번갈아 가며 드나들게 하면서 천자총통·지자총통·지자총통뿐만 아니라 장전과 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고 있을 때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을 둔 뒤 달려와서 함께 공격하니 성세가 배가 되어 방이 있는 대선과 2층 대선에 타고 있던 왜군들이 거의 다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중략》 ④다음날인 11일 꼭두새벽에 되돌아와 포위하였지만, 그 왜적들은 급히 닻줄을 끊고 밤을 타고 달아났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이때 ①적선이 안골과 가덕 사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나아가 싸우려고 하였지만, 날이 이미 저물어 마침내 흉도로 물러나 2일을 머물렀다. 26일 비로소 배를 정비하고 나가자 왜선 2척이 대마도에서 곧장 안골포로 향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는 곧 적의 병량을 싣고 운반하는 배였다. 노를 재촉하여 나아갔으나 적이 이미 안골로 들어가 미처 쫓아가지 못했다. 이때 ②적이 안골의 보 가운데에 진영을 쌓고 그들의 전선 16척을 수책 안에 매어 놓았는데, 대선 1척을 앞쪽에 세워 막아놓고 적이 그 위에 올라가 화포를 많이 쏘아댔다. ③우리 군사가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수로가 매우 비좁아 여러 배가 나란히 들어갈 수 없어서 매번 2~3척씩 번갈아가며 들어가 싸웠다. 《중략》 보에 있던 적의 무리가 대오를 나누어 드나들며 힘을 다하여 막았지만 사상자가 매우 많았고 배도 거의 부서졌다. 날이 저물 녘에 공격을 풀고 돌아와 저도로 나와 밤을 보냈다. ④27일에 날이 밝을 무렵 다시 나아갔는데, 적이 이미 군수품을 버리고 밤에 달아났다.
①번은, 조선 수군이 안골포 부근에 왜선이 정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날이 저물어 다른 곳에 정박하고 밤을 보냈다고 서술하였다. ②번은, 안골포에 다수의 왜선이 정박해 있었고 대선이 포구를 막고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③번은, 안골포로 진입하는 수로가 비좁아서 조선 수군 함대의 배가 안골포 안으로 번갈아 드나들며 일본군과 싸웠다고 서술하였다. ④번은, 조선 수군이 전투 다음날 다시 안골포로 돌아왔으나 일본군이 이미 전날 밤에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안골포해전 전투 경과는 그 내용이 대략 일치한다. 단, 「견내량파왜병장」이 전투 직전에 조선 수군이 온천도(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칠천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서술한 점에 비해 『증병조참판정공전』은 흉도(거제시 사등면 창호리 가조도)로 이동하여 이틀을 머물렀다고 서술한 점이 차이가 있으며, 또한 두 기록에 서술된 왜선의 규모도 차이가 있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안골포해전 직전 병량을 실은 왜선 2척이 안골포로 들어갔다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견내량파왜병장」에 없는 내용이므로 눈길을 끈다.
(4) 안골포해전 직후 조선 수군의 상황
「견내량파왜병장」에 따르면 안골포해전 다음날 조선 수군은 가덕도 동쪽으로 나아가 수색을 벌였다. 「견내량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안골포해전 직후 기록을 살펴보자.
「견내량파왜병장」
그날(7월 11일) 사시경(9~11시) 양산강 김해포구와 감동포구를 함께 수색하였으나 모두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마침내 동쪽으로 가덕 앞바다에 나가니 안골의 적이 바야흐로 배를 이끌고 감동창을 경유하여 김해로 달아나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그 뒤를 따라 감동 앞의 지름길로 조수를 타고 쫓아갔지만, 물이 매우 얕아 배가 나아가기 어려웠다. 《중략》 적은 김해의 죽도(竹島)로 들어갔다.
위 두 기록에 따르면 안골포해전 직후 조선 수군은 가덕도 동쪽 양산강 부근 김해와 감동포까지 나아갔다. 「견내량파왜병장」은 조선 수군이 김해포구와 감동포구를 수색하였으나 적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서술하였지만,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안골포에서 달아난 왜선을 발견하고 쫓아갔으나 결국 붙잡지 못했다고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왜선이 달아난 곳이라고 서술된 죽도는 서낙동강 수로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지금의 부산 강서구 죽림동에 있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김해죽도왜성 유적지가 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일본군은 이곳에 진을 세웠으며, 1593년에는 이곳에 죽도왜성을 축조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죽도를 주요 거점으로 이용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서술된 죽도 관련 기록은 개연성이 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나타난 임진왜란 초기해전 전투 기록을 충무공의 장계에 실린 전투 기록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실린 제4차 출전 시기 부산포해전 전투 기록은 그 내용 대부분이 조선 수군의 전투 경과보다는 녹도만호 정운의 활약과 그의 전사 상황을 서술하였기 때문에 살펴보지 않았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임진왜란 초기해전의 전투 경과는 충무공의 장계 및 『난중일기』와 일치하는 내용이 상당 부분 발견되며, 이러한 내용들은 신빙성이 높은 기록으로 판단된다. 비록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도 있지만, 충분한 검토를 통해 의미 있는 내용을 추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쪼록 『증병조참판정공전』이 임진왜란 해전 연구에 도움되는 자료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 본 글은 역사문화학회에서 출간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2호(2024)에 수록된 논문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