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고린도전서 10장
설교를 따라 광야의 실패를 비추는 믿음의 거울을 살핍니다. 영적 교만과 원망을 넘어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안식과 영광을 향해 걷는 성숙의 길을 깊이 묵상합니다.
단테의 《신곡》은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이
어두운 숲 한가운데 서 있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길을 잃었다는 자각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돌아갈 방향을 찾는 여정도 시작된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고린도전서 10장의 광야를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의 자리로 바라보며,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를 오늘의 믿음을 비추는 거울로 제시한다. 이미 섰다고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넘어짐에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바울의 경고가 이 설교의 문을 연다.
거울
앞에 선 믿음, 광야가 드러내는 교만
고린도 교회는 세례와 성찬, 말씀의 지식과 영적 경험을 자신들의 성숙을 증명하는 표지처럼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진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선언할 근거는 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성찰도 깊어져야 함을 일깨운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를 건넜으며,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경험했다. 그들의 여정에는 분명한 은혜의 흔적이 있었지만, 은혜의 경험이 자동으로
영적 성숙을 완성해 주지는 않았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간극을 응시하게 한다. 과거에 무엇을 경험했는가보다 지금 그 은혜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의 위험은 자신이 받은 것을 거짓이라고
여기는 데 있지 않다. 참으로 받은 은혜를 자기 소유처럼 붙들고, 그것을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바꾸는 데 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경험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이 더 이상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착각이었다. 은혜는 도착을 선언하는 훈장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억이어야 한다.
광야는 남의 실패를 구경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는 신앙의 연수도, 지식의
양도,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도 우리를 대신해 답하지 못한다. 말씀은
타인을 판단할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나의 교만과 자만을 드러내는 빛이 된다. 성경 묵상이 깊어진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느끼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조심하며 걸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는 일에 가깝다.
은혜를
잊는 순간, 원망이 마음을 굳게 한다
바울이 광야에서 꺼내 보이는 실패는 우상숭배, 음행, 주를 시험함, 원망이다. 이 네 모습은 서로 떨어진 죄의 목록이라기보다,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의 여러 얼굴로 제시된다. 금송아지를 세우는
조급함, 욕망에 자신을 내어주는 타락,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불신, 받은 것을 잊은 채 불평하는 마음이 결국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것은 은혜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방향이다.
특히 원망은 단지 기분이 상한 상태가 아니다. 설교의 흐름에서 원망은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인도와 공급을 망각한 데서 시작되고, 그 망각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하고도 불평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은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사람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회개는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잊었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된다.
히브리서의 경고처럼,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마음을 굳게 하면 약속된 안식 앞에서 멈출 수 있다. 반대로 감사는 현실을 미화하는 태도가 아니라, 광야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믿음의 자세다.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 말씀은 책망에 그치지
않고 다시 길을 여는 음성이 된다. 온유함은 약함이 아니라, 불신과
원망이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힘이다.
성경이 실패의 역사를 숨기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처럼, 광야의 기록은 우리를 정죄의 구경꾼으로 세우지 않고 변화의 자리로 부른다. 남의
넘어짐을 분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같은 씨앗이 내 안에도 있는지 살피게 하는 것이 성경 묵상의 정직함이다. 거울을 오래 본 사람은 타인의 얼굴보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닦는다.
시험의
한복판에도 소망의 길은 열려 있다
광야의 경고가 무겁기만 했다면 고린도전서 10장은 사람을 두려움 속에 가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13절에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감당할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내신다고
말한다. 실패의 역사를 보여 주는 목적은 체념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같은 길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깨어 있게 하는 데 있다. 경고 안에는
이미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소망이 들어 있다.
시험은 믿음의 부재를 증명하는 낙인이 아니라, 무엇을 의지하는지가 드러나는 자리다. 그때 사람은 조급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도 있고, 말씀과 은혜를 기억하며 인내할 수도 있다. 설교가
강조하는 ‘피할 길’은 어려움 자체가 즉시 사라진다는 약속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도 원망 대신 감사, 불신 대신 신뢰, 거친 반응 대신 온유함을 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는 확신이다. 믿음은
광야가 없다고 말하지 않고, 광야에서도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 지점에서 영적 성장은 화려한 체험의 축적이
아니라 반응의 변화로 나타난다. 같은 부족함 앞에서 이전처럼 불평하지 않고, 같은 지연 앞에서 성급히 우상을 만들지 않으며, 같은 유혹 앞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그 조용한 변화가 성숙의 증거다. 이
설교는 성장한 사람을 넘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넘어질 수 있음을 알기에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주어진 피할 길을 찾는 사람으로 그린다.
먹고
마시는 일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광야의 거울은 마침내 삶의 방향을 묻는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은 일상을 떠난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우상숭배와 원망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길에서 돌아서, 가장 평범한 선택까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이다. 신앙은
특별한 순간에만 드러나는 감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하루의 태도 속에서 형체를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 교회와 가정, 학교와
공동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자랑하기보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을 잊지 않을 때, 사역과 교육은 자기
확장의 도구가 아니라 감사의 응답이 된다. 성경은 과거의 실패를 감추지 않고 기록함으로 다음 세대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한다.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말씀의 목적은 결국 사람을 온전하게 세워 선한 일을 살아 내게 하는 데 있다.
그 길에는 온유함이 필요하다. 모세조차 원망이 거듭되는 광야에서 분노로 반석을 두 번 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설교의 대목은, 책임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일수록 마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지도자와 교사와 부모에게 필요한 힘은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강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사람을 대하는 인내와 부드러움이다. 온유한 마음은 안식으로 향하는
문을 닫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가 비추는 광야의 거울 앞에서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은혜를 오늘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이다. 이미 섰다는 확신이 나를 낮추고 감사하게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열매가 되지만,
타인을 내려다보고 회개를 멈추게 한다면 넘어짐의 징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선언하는 사람보다, 말씀을 듣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순종하는 사람에게 열려 있다.
광야는 지나가야 할 장소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교실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상을 버리는 법, 욕망을 경계하는 법,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법,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배움이 먹고
마시는 평범한 순간까지 스며들 때, 삶은 조금씩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게 된다. 오늘 내 마음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부드러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충분히 섰다는 생각 속에서 조용히 굳어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