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밀레니엄의 문턱을 넘으며 세상은 디지털의 물결에 휩싸였다. 아이돌 그룹의 시대가 본격화되던 그때, 아일랜드의 다섯 청년 Westlife는 첫 정규 앨범으로 순수한 발라드의 힘을 보여주었다. 《Fool Again》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프고 솔직한 노래였다.
연인이 떠난 뒤, “I should’ve seen it coming”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가사는, 사랑에서 반복적으로 바보가 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얼굴에 드러난 배신을 뒤늦게 알아차린 후회와 탄식.
나는 20대 초반, 그 노래가 나올 무렵의 나를 떠올린다. 학업을 중단하고 군 복무를 앞둔 채 휴식기를 갖던 시절, 소개로 그녀를 만났다. 입대 전까지 우리는 꽤 쾌활하게 교제했다. 그녀는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했고, 훈련병 시절 대전까지 면회를 왔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첫 휴가를 나온 날, 서울역을 지나다 멀리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는 한 남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스쳐 지나갔다. 며칠 후 근처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그날 본 광경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녀도 별말 없었다.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 1년여가 흘렀다. 광화문 거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나 역시 한 여자 친구와 함께였고,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진 직후였다. 저 멀리서 그녀가 보였는데, 또 다른 남자와 함께였다. 이전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남자 뒤로 슬쩍 숨었다. 나도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더럽게 기분 나쁜 인연이라고 느껴야 마땅했는데, 이상하게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또 바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Westlife의 노래가 내 가슴을 파고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시에 “If I could, I would turn back the time.”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후회.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깨달았다. 사랑이란 때로 위선의 옷을 입고 온다는 것을. 그녀는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그 사랑은 결국 서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Fool Again》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과거에는 서울역이나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야 배신을 알았지만, 지금은 한 번의 스토리 조회로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바보가 된다. ‘이번엔 다를 거야’ 하며 반복한다. 알고 보면 이 노래가 말하는 ‘fool’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순진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반복적으로 상처받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리킨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된다.
내가 광화문에서 미소 지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당했구나’ 하는 자책과 동시에, ‘그래도 나는 아직 사랑을 믿는 바보구나’ 하는 작은 위로. 위선적인 사랑, 계산적인 사랑, 순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사랑은 결국 자신을 더 깊이 바보로 만든다. 진짜 사랑은 유일하고 고귀해야 한다. 서로의 약점을 감싸 안으며, 배신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을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Westlife의 청아한 하모니가 울려 퍼지는 《Fool Again》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옛날 다방의 차 맛과 광화문의 미소를 떠올린다. 그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고,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사랑에서 바보가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바보짓을 통해 배우는 교훈만큼은 소중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부른다. “Can’t believe that I’m the fool again…”
그러나 이번엔, 조금 덜 바보가 되기 위해. 그리고 진짜 사랑을 만날 준비를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