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기를까 했는데, 결국 잘랐습니다. 가늘고 힘없는 모발이 길 잃고 헤매는 걸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항암 치료 동안 민둥산이었던 머리에 머리카락이 이나마 자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부실한 머리결의 원인이 다 독한 항암 약물 탓인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아프기 전에 쓴 글을 읽었는데, 마침 그 편지 속 저도 미용실을 다녀온 참이었습니다. 머리를 기르고 싶지만 모발이 가늘고 약해서 잘 끊어지기에 미용사가 기르지 못하게 한다고 푸념하고 있더군요. 수년 전만 해도 웨이브 컬의 긴 머리를 찰랑거렸다고 하니, '나이 들면 머리카락도 노화해요' 라는 소리만 듣고 괜히 야속했다 적혀 있었습니다. 제 머리카락은 항암 치료를 받기 전부터 이미 노화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전 왜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요?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장염에 걸려 소염제를 몇 번 먹었더니 피부 알러지가 생겨 가려워서 밤마다 괴로웠습니다. 예전에 소염제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는데, 항암 후 면역력이 떨어져 알러지 스위치가 켜졌다고 생각하니 쉬이 나을 거 같지 않아 집 근처 피부과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뜻밖의 말을 합니다. “수년 전에도 같은 알러지 반응으로 몇 번 병원을 찾으셨네요. 소염제가 원인은 아닌 것 같아요.” 알고 보니 피부 알러지도 항암탓이 아닌 수년 전부터 앓던 증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항암으로 뇌세포가 죽어서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나?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탓부터 하고 있다는 걸.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남 탓은 가장 쉬운 방편이지요. 전 항암치료라는 특별한 일을 경험한 덕분에 무슨 문제든 탓해도 되는 올라운드 비난의 대상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 작가는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잘 흡수하고 이는 판단을 편향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즉 사람은 타고난 편견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성향이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한다는 겁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건강상의 문제에 대해 쉽게 항암치료 탓을 하면 말은 되지만, 마음은 더 불편합니다. 또 재발하면 어쩌지? 하는 공포심까지 덤으로 얻고요.
썼던 글을 읽고,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내가 쥐고 있던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중립적인 사실엔 사람을 안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듣지만 듣지 않고, 말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아마 우리는 우리 안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사티어 빙산의사소통』를 쓴 심리학자 김영애 선생님의 말씀처럼 사는 게 힘든 건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견을 사실로 믿고 그 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남 탓을 하고 싶을 때, 비난하는 마음이 불안과 함께 올라올 때, 내가 기울어진 시소를 타고 있지 않나? 의심해 봐야겠습니다.
K People Focus 차경숙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수석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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