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 주) 본지는 지난 칼럼 「청년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를 통해 청년 이탈의 원인과 한국교회가 성찰해야 할 책임을 짚었다. 이번 글은 그 후속 칼럼으로, 진단을 넘어 청년이 다시 교회 안에서 신앙의 주체로 서기 위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살펴본다.
박동명 연신교회 장로는 청년을 교회의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로 바라보고, 청년을 동원하는 교회에서 그들의 은사를 세우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제언을 담았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해 왔다. 그러나 청년이 돌아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 전에, 기도하면서도 교회가 달라져야 하며, 우리의 기도는 회개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청년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시는 궁극적인 분은 하나님이다. 교회의 프로그램과 전략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며 청년이 복음을 듣고 신앙공동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불필요한 걸림돌을 걷어내야 한다. 사도행전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교회에 더하셨다고 기록한다(행 2:47).
성경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기록한다(눅 3:23). 또한 스데반이 순교할 당시 사울은 “사울이라 하는 청년”으로 기록되어 있다(행 7:58). 훗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그를 사도행전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부른다(행 13:9). 이는 사울이 회심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권면한다(딤전 4:12). 성경은 청년을 단지 보호와 훈계만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청년도 말씀과 삶으로 공동체에 본을 보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의 주체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해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선포한다(행 2:17). 성령께서 세대와 성별을 넘어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교회는 장년과 노년만의 공동체도, 청년만의 공동체도 아니다. 모든 세대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함께 섬기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청년을 얼마나 온전한 신앙의 주체로 인정하고 있을까? 중요한 결정은 기성세대가 하고, 청년에게는 행사 준비와 봉사만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청년의 열정은 필요로 하면서 그들의 질문과 문제 제기는 불편하게 여길 때도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청년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아니라 필요할 때 동원되는 인력으로 느낄 수 있다.
청년에게 일을 떠맡기는 것과 청년의 은사에 따라 사명과 책임을 맡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동원이고 후자는 세움이다. 성경은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선언한다(고전 12:7, 27). 청년도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이다.
그럼, 청년이 교회로 돌아오는 때는 언제일까?
먼저 교회가 청년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때이다.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무엇이 너를 지치게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취업과 주거, 관계와 결혼, 정신적 소진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신앙과 무관한 개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청년이 살아가는 현실 한가운데서 위로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교회 지도자가 먼저 회개하는 때이다. 목회자와 장로를 비롯한 지도자는 자신의 말과 삶이 일치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잘못했을 때에는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며, 재정과 의사결정 과정도 투명해야 한다. 청년의 모든 질문과 비판을 믿음 없음이나 불순종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질문을 억누르기보다 말씀 앞에서 함께 씨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 청년이 돌아오는 때는 예배가 청년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공연으로 바뀌는 때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응답이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가 청년의 삶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말씀이 취업과 관계, 불안과 실패, 소명과 책임의 문제를 비추어야 한다. 예배가 억지 의무로만 느껴지지 않고, 말씀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청년의 왕성한 활동력과 창의성, 디지털 감각과 공의에 대한 관심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에서 청년의 은사가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공적 논의에서도 청년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그들에게 책임 있는 섬김의 기회를 맡겨야 한다.
그러나 청년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청년에게 헌신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청년을 붙잡기 위한 행사를 늘리는 것보다 한 사람의 아픔을 듣고, 결석했을 때 먼저 안부를 묻고,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청년은 가난과 불평등, 전쟁과 혐오,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창조세계의 훼손에 민감하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죄인과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다. 교회도 지역사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이웃을 섬겨야 한다(눅 4:18; 막 2:15-17).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15:20). 이 비유를 오늘의 모든 청년에게 그대로 적용해 청년을 ‘탕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돌아오는 이를 먼저 보고,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교회의 환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청년이 교회로 돌아오는 때는 화려한 행사가 열리는 때가 아니다. 어쩌면 교계지도자와 필자와 같은 교회 장로가 먼저 회개하고, 청년의 질문이 존중받으며, 그들의 은사에 맞는 사명과 책임이 주어지는 때이다. 예배와 삶이 연결되고, 세대가 서로 돌보며, 교회가 사회의 아픔에 응답하는 때이다.
청년은 교회의 미래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다. 기성세대의 경험과 청년의 열정이 성령 안에서 만날 때 교회는 더욱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다.
청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말자. 한국 교회가 먼저 청년들의 말을 경청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걸어야 한다. 또한 청년이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며, 모든 세대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연신교회 장로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